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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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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과 미국의 배우, 인권운동가.난 그녀의 독보적인 재능과 직업정신에 압도되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순간적인 감정몰입에 능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톱스타가 되면 거기에 안주해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녀는 늘 열의를 갖고 자신을 새로운 한계로 밀어부쳤다. 전설 그 자체인 그녀를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보라색 눈으로 유명한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배우로, 30년 가까이[7]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는 인기를 누리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다섯 번 후보로 지명되고 그 중 두 번[8]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 2회[9] , BAFTA 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1회 수상자이기도 하다. AFI 선정 100년간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에 뽑히기도 했다. 말년엔 자신의 명성을 발판으로 유명인들 가운데 에이즈 퇴치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하고 주도적으로 앞서 박애주의자로 칭송 받았다.
초등학생 나이에 대스타가 되어 일상이 낱낱이 언론을 타게 되면서 유년기를 상실한 뒤 어른이 되어서는 더 큰 성공을 이뤄낸, 할리우드에서 매우 흔치 않은 사례다.[10] 어려서부터 "유명세가 마치 공기와 같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동시대의 스타들과 달리 사생활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 스타-대중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인권 운동 참여, 화려한 개인사, 그에 따른 고난 등 현 할리우드의 공식이 된 스타성의 필수 구성 요건들을 가장 앞서 제시한 인물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클레오파트라>로 할리우드 배우 최초 출연료 백만 달러 계약을 이뤄냈으며 이를 기념하는 공식행사까지 가졌으나 제작이 늦어져 개봉년도로는 여배우 최초의 기록이다.[11]
2. 생애[편집]
런던 햄스테드에서 미술중개상인 미국인 프랜시스 렌 테일러[12] 와 역시 미국인인 연극배우 출신 새러 바이올러 웜브롯[13]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로는 오빠 하워드가 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영국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미국과 영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4] 부계가 미술중개업에 종사한 덕에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두 살 때부터 교양 목적으로 발레와 노래 교습을 받았고 네 살 때부터 승마를 익혔으며, 왕족들과 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테일러가 3살 때 나간 학교 발표회에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해 지켜보기도 했다.
고위직들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화가 영국에 감돈다는 귀띔을 받고 테일러가 7살이 됐을 때 일가족이 귀국해 LA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베벌리힐스에서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화랑[15] 을 운영했고, 가족들은 주말마다 말리부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고모할아버지 하워드 영은 특히 재산이 많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같은 거물들과 친밀한 사이였고, 뉴욕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면서 코네티컷주에는 대저택을, 플로리다주엔 겨울 전용 휴양지를 구비하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어[16] 테일러 가족을 대리로 삼아 자신의 부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테일러는 "유명하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때부터 빼어난 외모로 근방에 소문이 자자해 할리우드 진출을 자주 권유 받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딸을 연예계에 내놓는 걸 선뜻 내켜하지 않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딸 보니 역할 제의도 거절해버렸다. 그러나 테일러의 연기 활동이 아직 가족들에게 많이 낯선 미국 사교사회에 녹아드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 서자[17] 1941년 테일러가 9살이 됐을 때 영화사와 계약을 체결했다.[18]
테일러는 1942년 10세 때 배우로 데뷔했으며 12살에 <녹원의 천사> 주연을 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는 "또래 아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과의 영원한 결별"을 뜻하기도 했다. 이때부턴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술에 취하기만 하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테일러의 말로 미루어 보면, 어린 딸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9] 모순되게도 테일러의 데뷔를 주저하던 어머니를 설득했던 건 먼저 마음이 바뀐 아버지 쪽이었다. 래시 시리즈 오디션 기회조차도 아버지의 친구가 MGM의 제작자여서 받게 된 것이었다.
15살 때 MGM 창립자 루이 B. 메이어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쓰며 고압적으로 구는 걸 보고 "너나 스튜디오나 다 꺼져버려!"라고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부회장들까지 나서서 중재했지만 테일러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고 루이 B. 메이어가 오히려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이때 MGM에서 자신을 내쫓지 않는 걸 보고 본인의 상품 가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테일러의 어머니는 촬영장마다 일일이 쫓아다녀 지나친 과보호가 비아냥을 샀는데, 사실 이 덕분에 테일러는 20세기에 활동한 다른 아역스타들과 달리 마약 강요나 성희롱 같은 더러운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20]
성인 연기자로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게 해준 작품은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에 TV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기존 영화 체계가 전부 허물어지게 된다. 테일러는 딱 이 시기부터 성인 연기자로 활약했음에도 그 직전에 아역 스타로서 전통 스튜디오 양식을 제대로 다 경험했던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할리우드 황금기 스튜디오 체계가 남긴 최후의 유산"이라고 한다.[21]
이후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 -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성우로 출연한 것까지 합치면 80여 편 - 를 찍었다.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도 대표작이다. 특히 개봉 당시 실제 배우자였던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실감나게 막장 부부 연기를 보여준 게 유명하다.
평생 연기 수업 한 번 받은 적 없이 현장에 바로 투입되었음에도 처음부터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테일러는 기억력과 현장집중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배우라면 웃고 떠들다가도 큐 신호에 즉각 연기에 몰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직전에 준비가 필요하다며 대사를 다시 확인하거나 집중을 위해 워밍업을 하며 다른 배우들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모든 장면의 촬영을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걸로도 정평이 나있었다. 코미디, 심리극,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전부 능란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연기폭도 넓었다. 이에 부합하는 영예로운 상을 많이 탄 축에 속하지만, 그만큼 "스넙" 당한 적도 많아 이미 당대부터 미모 때문에 연기력을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하는 여배우의 예시로 자주 꼽혔다.
출연작 제목대로 태어났을 때부터 미모, 돈, 연기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여성"이었지만 타고난 조건들이어서 그랬는지 이 모두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모두가 꺼리던 HIV/에이즈 인권 운동에 앞장서면서 "처음으로 삶에 목적 의식을 갖게 된다."
1983년 12월 5일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해결하고자 베티 포드 센터[22] 에 할리우드 스타 최초로 자진 입소했다. 자니 카슨, 메리 타일러 무어 등 동료 스타들이 그 뒤를 따랐고, 덕분에 중독 문제를 쉬쉬하던 미국 사회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중독 문제를 주변인들과 공유하고 치료소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게 되었다. 1984년 1월 20일 퇴소했지만, 1988년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녹원의 천사>에서 승마 연기를 하다가 척추를 다친 게 고질병이 되어서 허리 통증을 해결하려다 진통제에 중독돼 고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의료진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과잉복용 때문이었다. 1990년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는 80년대에 테일러에게 진통제 처방전을 수천 장 내준 3명의 의사를 적발했고 후에 경고장을 보내 견책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멀쩡한 신체기관이 전무한 수준이라 온몸의 장기를 돌아가며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다.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억이 "고통"일 정도였다. 래리 킹조차도 왜 나한테만 이런 가혹한 질병들이 벌어지나 하늘을 원망한 적 없냐고 안타까워했을 정도. 평생 밤마다 끙끙댔지만 티내지 않고 밝게 생활했다. 수많은 병마와 각종 사건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표현이 자주 붙었다.
1994년과 1995년엔 두 번의 고관절 교체 수술이 있었다. 1997년엔 뇌졸중이 뇌종양 제거 수술로 이어졌다. 2002년엔 피부암 방사선 치료를 견뎌야 했다. 1998년과 2004년엔 등에 압박골절이 일어나 수술을 거쳤고 말년엔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11년 3월 23일 울혈성 심부전증 투병 중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친구 조운 콜린스는 유명인의 사망에 언론 취재가 이 정도로 몰려든 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타계 이후로 처음 겪는 장면이었다고.[23] 장례식은 비공개로 가족끼리 치렀으며, LA 인근의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에 묻혔다.[24] 2012년 사후 수익 랭킹 1위를 차지했고[25] 2017년까지 최상위 명단에 연속으로 올랐다.
3. 주요 출연 작품[편집]
3.1. MGM 아역스타 시절[편집]
- 귀로(There's One Born Every Minute), 1942 - 글로리어 트와인 역
유니버설 픽처스와 MGM이 '신비로운 눈을 지닌 9살 여자애' 테일러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접촉해왔다. 어머니가 유니버설을 택해 계약 후 찍은 첫 작품이다. 주인공의 막내딸 역할이었다. 그러나 유니버설은 곧 아이답지 않은[26] 성숙한 얼굴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됐고 계약을 취소했다. 이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테일러는 전문 성악 발성으로 어른처럼 노래하는데[27] 이처럼 아이답게 노래할 줄 모르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 래시 집에 오다(Lassie Come Home), 1943 - 프리실러 역
그 유명한 래시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MGM이 영국식 억양의 조연을 필요로 하면서 오디션을 통해 3개월 임시 계약을 했다.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각인 시킨 첫 작품이다. 결국 7년 짜리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 제인 에어(Jane Eyre), 1943 - 헬런 번즈 역
20세기 폭스 제작. MGM이 테일러를 빌려줬다. 로체스터 역을 맡았던 오슨 웰스는 어린 테일러의 미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초반에 짧게 나오지만 불운을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소녀를 강렬한 존재감으로 표현하며 영화 전체에 고딕 분위기를 잘 깔아주었다는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 1944 - 벳시 케니 역
로디 맥다월이 아이린 던의 아들로, 테일러가 이 아들이 좋아하는 이웃 소녀로 나온다. 감독은 테일러를 눈여겨 봤다가 <녹원의 천사> 주연으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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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은 1948년 2월 21일자 라이프지에 실린 필립 할스만의 작품이다.[2] DBE를 받은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에 줄리 앤드루스, 헬런 미런,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등 열손가락 안에 든다. 다른 분야로는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DBE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기사 준 2등급(Knight Bachelor)보다 높으며 KBE를 받은 찰리 채플린과 동등한 정식 2등급 기사 등급이다.[3] 활동 당시 신체 정보[4] 입양한 딸이다.[5] 본인은 어린 시절 오빠가 놀리던 별명("Lizzie the Cow, or Lizard")에서 유래된 이 애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발음이 hiss(히스. 야유하다, 쉭쉭대다 등의 뜻이 있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 타드가 사망할 때 타고 있던 전용기 이름이 하필 "The Lucky Liz"였다. 1992년 자니 카슨 쇼에 출연했을 때도 이 애칭과 본명 중 무얼 더 선호하냐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라고 답한 뒤 "엘리자베스라고 불리는 게 진심으로 더 좋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참고로 오빠와는 평생 우애가 좋았다.[6] 보유 기네스 기록이 엄청 많다.[7] 40년대 - 60년대.[8]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여배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먼,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비비언 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등이 있다.[9] 이중 한 회는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연기특별상이다.[10] 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경우는 마이클 잭슨 정도다. 주디 갈런드도 <오즈의 마법사>를 10대 후반인 청소년기에 찍었다.[11] 개봉년도순으로는 남녀 통틀어 말런 브랜도의 <바운티호의 반란>이 최초다. 두 영화는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논란이 많은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인 시대극이며, 크게 흥행했음에도(<바운티호의 반란>은 개봉년도 전체 흥행 5위, <클레오파트라>는 개봉년도 전체 흥행 1위.) 제작비를 너무 거하게 들여 회계상으론 거하게 말아먹었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의 작품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으며, 제작자와 감독이 징하게 싸운 악명 높은 촬영장이며, 그로 인해 한창 유망하던 명감독들이 은퇴를 결심하게 만들었다.[12] 1897 - 1968.[13] 1895 - 1994. 걸음마를 떼자마자 발레 훈련을 받은 무대 배우였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테일러가 출산한 뒤에는 바쁜 테일러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곤 했다.[14] 당시에는 영국도 현재의 미국,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국적 속지주의를 채택하여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영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을 부여하였다. 현재는 혈통주의로 개정되어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15] 1949년 하워드 휴즈는 이 화랑에 들린 테일러를 잠깐 보고 반해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100만 달러(오늘날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는다)을 줄테니 테일러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결혼이 성사되면 테일러 한 사람을 위한 단독 스튜디오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보석이 가득 담긴 서류가방을 보내기도 했다.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테일러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전부 거절하고,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16] 20대 초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은 뒤 생식능력을 잃고 말았다.[17] 테일러가 화제거리가 되면 가족 전체가 사교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이었다.[18] 이때 누가 실질적으로 스튜디오들과 테일러 가족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당대 최고의 연예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였다는 얘기도 있으나 하퍼와 테일러 가족은 전혀 친하지 읺았다.[19] 1999년 친구 바버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는 마이클 잭슨과 가까워지게 한 공통분모이기도 하다.[20] 마약의 경우는 테일러의 작업 속도가 워낙 빨랐고 가는 체형이어서 작업 능률 향상과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하던 MGM의 소위 비타민 주사("vitamin shots")를 처방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21] 테일러는 세대적으로 보면 클래식 할리우드 말기를 장식한 비트 세대 할리우드 스타에 속한다. 하지만 동시대 배우들과 달리 셜리 템플처럼 일찍 데뷔해 클래식 할리우드 체계를 체험한 케이스.[22] Betty Ford Center. 전 영부인 베티 포드가 설립한 곳으로, 베티 포드도 사회 통념 때문에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이를 대중과 공유한 바 있다.[23] 이로써 20세기 할리우드를 수놓은 고전배우들(비비언 리, 매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대부분이 역사로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소피아 로렌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24] 절친 마이클 잭슨과 같은 묘지다.[25] 이전에 1위를 지속한 인물은 마이클 잭슨.[26] 당시 아역계의 교과서였던 셜리 템플을 기준으로 봤을 때.[27] 테일러는 성인이 된 후 아리아까지 소화해냈다.
-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4 - 벨벗 브라운 역
첫 주연작이다. 남장을 한 채 애마에 올라 장애물 경마에 나가는 소녀의 애기다. MGM은 수준급 승마와 영국식 억양 구사가 가능한 어린 여배우를 찾는 데 큰 난항을 겪었다. 가까스로 테일러를 구한 뒤엔 아직 체격이 작아 원작 주인공에 어울릴만큼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MGM이 몇 달 기다려주는 동안 테일러는 승마를 더 연마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MGM 간판스타 미키 루니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으로 성공했다. "그 세대의 또래 소녀들은 모두 녹원의 천사가 되고 싶어했다."[28] 테일러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연기가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아이였던" "내 실제 삶의 연장이었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같이 연기할 말을 직접 골랐는데 MGM은 이 말을 13살 생일선물로 줬고 테일러는 이 말이 사망할 때까지[29] 길렀다. 테일러에게서 대스타의 가능성을 엿본 MGM은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용감한 래시(Courage of Lassie), 1946 - 캐서린 "캐시" 엘러노어 메릭 역
래시 시리즈 주연을 꿰찼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 1947 - 메리 스키너 역
- 신시아(Cynthia), 1947 - 신시어 비셥 역
대본에 버스터 키튼이 참여했다. 뮤지컬에 재능이 있다는 설정이다. 테일러는 학교 오디션 장면에서 곡 하나를 능숙한 성악 창법으로 완창한다. 후에 MGM의 뮤지컬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댓츠 엔터테인먼트>(1974)에도 실렸다. 지미 라이든과 또 연애 관계로 엮인다. 로비 카드가 예쁘게 뽑혔다.